

Inquisitor Trevelyan
Written by 루카
"그 남자(컬렌)한테선 딱총나무꽃과 떡갈나무 이끼 냄새가 나. 수상쩍다고."
- 연금술사 '루카', 드래곤 에이지 인퀴지션 멀티플레이 밴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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렐리아나가 테다스 방방곡곡에 파견한 요원 중 몇 명이 보고를 위해 스카이홀드를 찾았다는 사실을 지나가듯 언급했다. 에메랄드 무덤숲에서 거인들의 발길질과 귀신 들린 저택을 벗어나느라 넋이 아직 다 돌아오지 않았던 인퀴지터는 워 테이블을 바라보며 반쯤 선 채 졸고 있었지만 나이팅게일 수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대충 기억했다. 요원들은 보고를 마치고 현장으로 복귀하기 전 전령의 쉼터 선술집에서 바텐더 캐벗의 무뚝뚝한 서비스와, 주인이 말이 짧은 만큼 맛없고 독한 특제 에일을 제공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인퀴지터 트레벨리안이 스카이홀드 선술집을 지나다가 그 말을 엿들은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요원 중에 -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 약제학에 해박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에블린은 전령의 쉼터의 낮은 창턱을 지나치며 그 요원이 반쯤 술에 취해 떠들었던 대화를 똑똑히 기억했다.
"사령관은 안 믿는 게 좋을 거야. 그 남자한테선 딱총나무꽃과 떡갈나무 이끼 냄새가 나. 수상쩍다고."
"뭐가 수상쩍어? 적어도 피랑 땀냄새보단 낫지 않아?" 요원과 반주를 하던 다른 인물의 물음이었다. 에블린은 걸음을 우뚝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안드라스테의 사자, 인퀴지터가 벽 뒤에 숨어서 다른 사람들 대화를 엿듣다니.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분명 품위 없다며 혀를 찼을 테지만 대화의 주제가 주제인 만큼 에블린은 신경 쓰지 않았다. 불필요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남의 손가락질 대신 그녀는 더욱 청각에 집중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우린 지금 전쟁 중이야. 전장 한복판에서 그렇게 좋은 냄새가 난다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게다가 그 머리카락 봐! 엄청 공들여서 매일 손질하지 않고서야 그렇게 완벽한 각은 나오지 않는다고. 내 말이 틀려?"
(그 뒤에는 알콜의 영향으로 대화의 음량과 수위가 급격히 상승했기에 에블린은 주의를 거두었다.)
또 하나의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요점이었다. 다음에 컬렌을 본다면 그의 머리카락도 유심히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에블린은 기대고 있던 벽에서 등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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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퀴지터? 뭐하시는 겁니까?"
에블린은 컬렌의 뒷덜미에 박았던 코를 슬그머니 떼었다. 나름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도 들킨 모양이었다.
컬렌은 깊게 잠을 자는 편이 아니었고, 사소한 자극에도 단숨에 무장을 갖출 기세로 퍼뜩 깨곤 했다. 악몽을 꿀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가끔 끔찍한 과거를 다시 체험할 때면 컬렌은 식은땀을 흘리고 신음하며 몸부림을 치곤 했다. 새벽녘에 갑자기 싸늘해져서 눈을 떠보면 괴로워하는 컬렌과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마주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컬렌은 매우 미안해 하며 이불 두 채를 쓰거나, 아니면 각자의 방에서 따로 잘 것을 제안했다. 에블린은 전자는 고려했으나 후자는 단호히 기각했다). 에블린의 손길과 이마에 닿는 입맞춤에 다시 그의 눈은 금방 평온을 되찾았지만 얼굴에 새겨진 선들은 한참 동안 가시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오랫동안 조용해서 잠든 줄 알았었는데. 에블린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다시 컬렌의 헐벗은 목에서 어깨까지 코와 입술을 쓸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컬렌의 얼굴이 빨개지는 게 뒤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에블린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으며 그의 어깨에 대고 미소지었다.
"궁금해서요. 누가 사령관님에게선 딱총나무꽃과 떡갈나무 이끼 냄새가 난다고 해서 말이죠."
"네? 누가 그런……잠깐만요―간지럽습니다, 인퀴지터."
"에블린이에요. 둘만 있을 땐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에블린."
컬렌의 목소리에서 수줍은 기는 가시지 않았지만 에블린은 저으기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는 피로에, 그녀는 앵커가 주는 해묵은 통증에 젖어 진득하고 느리게 사랑을 나누었던 게 벌써 한참 전의 일 같았다. 그들이 갖지 못한 단 한 가지가 여유였으나 둘은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느리고 지쳤어도 이때를 위해 숨겨두었던 일말의 다정함을 끄집어내어 서로를 어루만지고 애무했다.
그게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다시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런 에블린의 몸을 덥혀주려는 듯 컬렌이 뒤척여 마주보고 누웠다. 에블린은 기꺼운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그에게 달라붙었다. 컬렌의 몸은 평소에는 빙하 못지 않게 단단해 보였지만, 훤칠한 신장과 새하얀 피부를 자랑하기라도 하듯 이렇게 길게 드러누웠을 때면 난로처럼 따끈따끈하고 녹신녹신했다.
차가운 손에도 컬렌은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다. 대신 잠자코 에블린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게 해줄 뿐이었다. 믿음직한 두 팔이 등을 감쌌고, 에블린은 또다시 그의 목과 어깨가 만나는 지점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딱총나무꽃이 그러고보니 어떻게 생겼더라. 본 적이나 있던가. 아마 힌터랜드 어딘가에서 자란다는 풍문을 들은 것도 같았다. 서재에서 식물 서적을 찾아보거나, 다음에 현장에 나가게 되면 자세히 살펴봐야겠다고 에블린은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인ㅋ……에블린?"
"나는 정작 딱총나무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구나, 라고 새삼 깨닫고 있었어요."
"딱총나무꽃이라. 보시면 실망하실 지도 모를 텐데요. 예언자의 월계수나 크리스털 그레이스처럼 화려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당신 같은 향기가 나는 꽃이라잖아요. 한 번 보고 싶어요."
에블린은 어리광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라고 스스로를 여겨왔지만 가끔씩 컬렌과 같이 있을 때 그녀가 하는 말과 행동은 본인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컬렌은 그런 칭얼거림조차 늘상 애정 어린 눈빛과 손길로 받아들임으로서 그녀를 더욱 놀라게 했다). 지금도, 컬렌은 마주 웃으며 그녀의 등을 달래듯 토닥였다. 에블린은 다시 한 번 깊게 숨을 쉬며 그의 드넓은 가슴에 기쁘게 코를 묻었다. 깨끗하고 청량한 그의 피부 냄새를 맡자 그녀는 모처럼 아기처럼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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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굿간 관리자인 데넷이 강력히, 그리고 자랑스럽게 추천한 아마란틴산 수말은 투박하고 거친 바위길도 아무 불평 없이 올라감으로서 그 주인의 추천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에블린은 오른손으로 말의 목덜미를 쓸어주며 칭찬해주었다.
하늘 위에서 쏟아지는 태양빛이 탁 트인 계곡을 비췄다.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고룡은 벌써 죽은지 오래였고 그 뼈의 골수까지 인퀴지션에서 모조리 채취해갔지만 여전히 곳곳에는 드레이크들이 돌아다녔다. 적당히 짐승들을 처리해서 갑작스럽게 불똥을 뒤집어쓸 위험에서는 벗어났다고 판단되자 에블린은 말에서 내려 풀숲이 우거진 지점들을 특히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책에서는 분명 이 근처 어디라고 한 것 같은데, 어디에 있는 거지……
"여기 있던 용은 이미 죽인 줄 알았는데. 왜 또 온 거야?"
"찾을 게 있어서."
사냥이 끝난 사냥터에 구태여 돌아온 인퀴지터를 이해하지 못한 불이 투덜댔지만 에블린은 듣지 못한 척 덤불을 헤치고 살폈다. 결국 먼저 성질이 난 불이 슬며시 그녀에게 다가와 육중한 팔꿈치로 등을 툭 쳤다. 쿠나리에겐 가벼운 '툭'이었지만 인간인 에블린에게 있어서는 앞으로 넘어질 뻔한 일격이었고 그녀는 휘청거리던 몸을 재빨리 다잡으며 그를 힘껏 노려보았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도전적으로 웃는 쿠나리 용병과 마주했다.
잠시 침묵 속에서 시선만이 오갔다. 에블린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들어보였다.
"여기서 자라는 꽃이 있다고 해서 그걸 찾으러 왔어."
"……꽃? 무슨 꽃?"
"딱총나무라는 나무의 꽃인데. 혹시 알아?"
불이 눈을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아 에블린은 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녀로서는 드물게도 능청스레 말했다.
"이봐, 불.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그래, 우리가 친구라서 운 좋은 줄 알라고. 이런 것까지 도와줘야 하다니, 나참."
"대신 이번에 서부 진입로에서 진행 중인 드래곤 유인 프로젝트가 끝나면 데려가줄게. 어때?"
"거래 성립. 딱총나무라고?"
에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스마의 전공은 식물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짚어준 식물 도감에 나온 딱총나무꽃은 작고, 희고, 무더기로 흐드러지게 핀다고 했다. 마침 지금이 한창 개화기라는 말에 엘프룻을 채집한다는 말도 안 되는 답사 핑계를 대고 무작정 말을 몰아 달려온 차였다. 물론 에블린이 찾는 건 엘프룻이 아니었고, 딱총나무꽃을 찾는 이유는 맨정신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하딩이 엘프룻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레이디 셰이나의 계곡을 말없이 가리킨 것 또한).
아마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굴부터 붉히고 볼 컬렌을 떠올리자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일부러 불에게서 등을 돌린 채 에블린은 열심히 꽃을 찾아 헤맸다.
"보스! 이 나무인 것 같은데?"
"어디?"
불의 손끝을 따라 에블린의 눈에 들어온 딱총나무는 때마침 계절을 맞아 무성하게 꽃을 피운 터였다. 에블린은 가슴이 부풀어 오를 만큼 크게 숨을 들이쉬었지만 들은 대로 아무런 향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딱총나무꽃은 장미나 히아신스처럼 겉모습도 향도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그 향기가 나는 남자와 어울린다고 에블린은 잠시 생각하며 꽃이 무겁게 흐드러진 가지 하나를 끌어내렸다. 연인의 체취와 놀랍도록 닮은 가볍고 상큼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전장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꽃이었다. 그러나 전장에는 많은 것들이 어울리지 않았다. 작고 흰 꽃, 상큼한 향기도. 남몰래 주고 받는 눈길, 기습적인 입맞춤과 어색한 고백, 침대 안에서 함께 나누는 온기도. 당장에라도 세상이 멸망할 수 있다는 무게감을 어깨에 지고서도 애시당초 살아남았다는 우연만으로 돌고 돌아 만난 두 사람도. 연인들도.
입매가 씰룩거렸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에블린은 근래 보인 중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며 불을 돌아보았다. 불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던 걸 봐서는 성공적으로 숨기진 못한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일부러 활기차게 말했다.
"내가 찾던 게 바로 이거야. 좀 도와주겠어, 불?"
"……뭐든지,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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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안은 인퀴지터에게 딱총나무 이파리는 지역을 불문하고 약용으로 쓰이지만, 특이하게도 꽃으로는 음료수를 만든다고 알려주었다. 티빈터인들은 딱총나무 꽃으로 시럽을 만들어서 일종의 자양강장제 내지는 청량음료처럼 마시는 모양이었다. 그에 의하면 더운 여름에 시원하게 마시면 특히 인기 있는 별미라고 했다.
("물론 내가 많이 마셔본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수천 년간의 조심스러운 혈통 교배와 신중한 정략혼을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을 오만하고도 잘생긴 미소를 띄우며 도리안은 덧붙였다. "주로 서민들이 즐겨 먹는 음료였거든.")
서민 전용이건 아니건 에블린에겐 몹시 흥미로운 아이디어였다. 처음에는 그저 꽃을 한 아름 꺾어다가 컬렌의 집무실에 갖다놓을 생각이었지만 중간에 계획을 수정해, 에블린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딱총나무 꽃을 따오게 되었다 (아이언불은 계속 뿔에서 꽃가루가 묻어나온다고 나중에 불평했지만, 에블린이 꽃가지들에서 털어내야 했던 작은 벌레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결론적으로는 지금, 에블린은 한껏 가벼운 발걸음으로 컬렌의 집무실에 향할 수 있었다. 들뜬 기분에 보고를 마치고 돌아가던 정찰병에게도 밝은 미소를 지어준 뒤 - 그 병사는 거의 질겁하다시피 하며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 에블린은 컬렌의 문 앞에 섰다. 손 안에 쥔 쟁반이 새삼 무겁게 느껴졌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보다 더한 일들도 겪었는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 긴장인지 기대감인지 모를 가벼운 압박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들뜬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직접 밀어 열거나, 아니면 노크를 하려 들기도 전에 무거운 참나무 문이 저절로 열렸다. 에블린의 눈이 조금 커졌지만 문을 당겨 연 당사자인 컬렌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오시는 걸 봤습니다. 무거우실까봐요."
컬렌의 중얼거림은 뺨에 와닿은 입맞춤에 뚝 그쳤다. 그가 잠시 굳은 틈을 타 에블린은 문을 잡은 팔 아래로 살짝 몸을 숙여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침침하고, 어딘지 모르게 눅눅하고, 천장에 구멍이 시원스레 뚫린 공간이었다. 에블린은 책상 위에 쟁반을 먼저 내려놓은 다음 컬렌에게로 돌아서서 그의 뺨에 또 한 번 입을 맞췄다. 사령관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져서 그녀는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참 다정하네요."
"……별 말씀을요. 뭘 가져오신 겁니까?"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에블린은 웃으며 그를 이끌었고 컬렌은 그런 에블린을 순순히 따라왔다. 컬렌은 항상 그랬다. 뿌리치거나 밀쳐내지 않았고, 어색하나마 항상 정중하고 진심이었다. 자신의 애정을 과시하거나 알아달라고 전시하지 않았다. 컬렌의 애정 표현은 그의 됨됨이처럼 조용하고 겸손하다가도 가장 뜻밖의 상황에 열정을 드러내며 평형을 가장 황홀하게 무너뜨렸다. 그러다가도 때로는 철저히 훈련되었지만 스스로를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번견처럼 머뭇거렸다. 에블린은 컬렌의 그런 점을 사랑했다.
컬렌이 제 손을 감싼 에블린의 가는 손가락을 꼭 쥐었다. 에블린은 다시 한 번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쟁반 위의 기다랗고 목좁은 유리병을 들어올렸다. 연한 노란색의 투명한 액체가 찰랑거리며 중력을 따라 두 개의 잔으로 떨어졌다.
컬렌의 의아해 하는 호박색 눈을 마주보며 에블린은 잔 하나를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든 그가 차마 숨기지 못한 의구심을 보고서도 인퀴지터는 다만 짧게 웃으며 그의 잔에 자신의 잔을 갖다댈 뿐이었다.
"좀 진부하지만,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건배할게요."
"그럼 저도 거기에 건배하겠습니다."
에블린은 잔을 입술로 가져갔지만, 바로 비우는 대신 컬렌이 먼저 첫 모금을 마시는 모습을 응시했다. 차가운 유리가 입술의 흉터에 닿고, 안에 든 액체를 삼키자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낯선 맛에 컬렌의 눈이 조금 커지는 것을 본 그녀의 미소도 커졌다. 책상에 편히 허리를 기대며 에블린은 비로소 자기 몫의 잔을 들었다. 레몬과 민트의 시원한 향기가 났다.
"이건……색다르군요. 화이트 와인인줄 알았습니다만."
"업무 수행 중에 술을 권해서 사령관님의 평판을 망칠 수야 없죠," 에블린은 즐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딱총나무꽃으로 만든 엘더플라워 코디얼(Elderflower cordial)이예요. 꽃을 따다가 시럽을 만들어서 물에 탄 건데, 괜찮나요?"
딱총나무꽃이라는 말에 컬렌의 움직임이 멎었다. 둥그렇게 눈을 뜨고 인퀴지터를 쳐다보던 사령관의 표정이 변해가는 것을 에블린은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놀랐다가, 당황했다가, 고마워했다가, 쑥쓰러워했다가. 평소 감정 표현이 절제된 사람 치고는 참으로 다채로운 표정이었기에 에블린은 결국 다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목청을 가다듬은 컬렌이 분위기를 돌리려 질문을 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처음 먹어보지만 향이 좋군요. 이건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만들었죠. 세라와 콜과 도리안의 도움을 받아서."
사실 그 중에서 제대로 도와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도리안은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꽃과 레몬과 설탕의 비율, 썰린 레몬의 비율, 설탕 시럽의 점도 등에 대해 반쯤 농담 섞인 잔소리만 늘어놓으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세라는 코디얼에 들어갈 레몬을 썰다가 지루해져서 칼을 내팽개치고 탈출하려 했었다. 그러다 낌새를 눈치채고 도움이 되고 싶다며 나타난 콜에게 지긴 싫다는 이유로 다시 남아 레몬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레몬의 태반을 못 쓰게 되어버려서 에블린은 다시 부엌까지 가 어안이 벙벙한 일꾼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돌아와보니 도리안은 배를 잡고 박장대소 중이었고 세라는 사라졌으며, 남은 딱총나무꽃과 깎아낸 레몬껍질로 어떻게 솜씨 좋게 엮은 화관을 머리에 얹고 어리둥절해 하는 콜만이 남아 있었다.
에블린은 그 긴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진 않았다. 다만 그녀는 짤막하게 설명했다.
"꽃을 따서 설탕물과 레몬에 졸인 다음 재워두는 거예요. 며칠이 지나면 샛노란 색깔이 되죠. 아주 투명하고 고와요."
"직접 만들기까지 하신 겁니까?"
"그럼요, 당연하죠. 당신에게 주려고 했던 걸요."
컬렌의 얼굴은 귀끝까지 빨개졌다. 아, 그녀가 바랐던 모든 반응을 그는 착실하고도 성실하게 보여주었고그것만으로도 그 모든 노동과 곤욕이 보람 있었다. 에블린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다시 엘더플라워 코디얼을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 액체가 기분 좋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잔을 완전히 비우기 전, 그녀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향뿐만이 아닌 걸요. 당신의 맛이 나요."
컬렌이 음료를 뿜어내지 않은 건 실로 안드라스테의 보우하심이었다. 적어도 에블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다지 믿지도 않는 메이커에게 소리 없는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컬렌의 빨개졌어도 여전히 잘생긴 얼굴을 눈으로 음미했다. 저 홍조가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아는 건 메이커와 에블린 본인뿐이리라. 한동안 부끄러운 - 그러나 불편하지는 않은 - 침묵이 공기 중에 내려앉았다.
에블린이 잔을 기울이며 안에 남은 액체를 가늠한 것과 컬렌이 불쑥 입을 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딱총나무는 사실 제 고향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수목입니다. 특히 여름에 흐드러지게 꽃이 핍니다만, 신기하게도 향은 거의 나질 않죠. 바닥이 눈으로 덮인 것처럼 보일 만큼 두텁게 꽃잎이 떨어져도 말입니다."
바닥을 가릴 정도의 코디얼을 조금 남겨놓고 에블린은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 작은 동작을 보지 못한 컬렌은 여전히 자기 몫의 잔을 든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녀를 보지 않는 채였다. 마치 그 홀로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처럼, 그녀의 손이 닿지 않을 것처럼 공허하고 멀리 떨어진 시선을 하고.
"겨울에는 얼어죽는 사람들이 한 둘씩 나올 만큼 추웠고, 여름에도 그렇게 따뜻한 건 아니었지만……아, 죄송합니다, 인퀴지터.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서 혼잣말을 늘어놓고 있었군요."
"에블린이에요."
그리고 괜찮아요. 어느새 컬렌의 앞으로 바짝 다가선 채 에블린은 중얼거렸다. 놀란 듯 컬렌의 눈꺼풀이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지만 다시 그의 입매도 눈도 부드러워졌다. 에블린도 그제야 마주 웃으며 그의 손에서 잔을 자연스럽게 가져갔다. 그리고 마지막 남았던 한 모금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미지근해졌지만 여전히 상큼하고 달콤한 액체를 입술에 묻힌 채 그녀는 컬렌의 얼굴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컬렌이 눈을 감자 길고 곧은 속눈썹이 그녀의 광대뼈를 간지럽혔다. 에블린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 모든 게 끝나면 꼭 보고 싶군요. 데려가주겠어요?"
"……얼마든지요. 에블린."
이 모든 것이 끝나면. 비록 그게 언제가 될 지는 모르나, '언젠가' 라는 말에 평소와 같은 불안감은 들지 않았다. 놀랍고도 놀라운 사람, 엘더플라워 코디얼의 향과 맛이 나는 나의 연인. 흐드러지게 핀 새하얀 꽃 아래서 그와 마주 보고 웃는 상상을 하자 에블린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그녀는 그를 꼭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